글
청흑교류회 청3b 최종인포입니다~
청흑교류회 신/구간 최종인포입니다.
구간의 경우 예약 수량 외 재판하지 않으며,
신간 역시 재고가 남지 않게 1-2권 가량만 현장판매할 예정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신간|청흑|B6 |무선제본|100p 내외|₩10000|리맨물
※ 주의사항
1. 하반기 통판 혹은 12월 디페스타에 이어지는 내용의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2. 모브 여성이 등장합니다.(관련된 내용은 하단 샘플에 나온 정도입니다. 특히 SAMPLE2 참고해주세요.)
>>줄거리 간략 설명
새로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 아오미네가 사내 커플에게 휘말려 소문의 주인공이 된 쿠로코(모브 여성한테 농락당했습니다)에게 >트루럽<을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모브여성의 언급은 SAMPLE에 나온 정도이며, 손도 안 잡고 세 번 정도 만났다는 설정입니다.
(아직까지 초반의 내용이라 연애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쿠로코 테츠야는, 반 년 간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다.
헤어졌다는 단어 하나로 사람의 관계가 바뀌는 것처럼, 그가 그녀와 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연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3년간 사귀고 있었던, 같은 부서의 직원과. 그 두 사람이 영업부의 공공연한 대표 사내 커플이며, 2년 전부터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었고, 그 사실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쿠로코 테츠야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자신의 앞에 청첩장이 내밀어지며 여자가 이별을 고했을 때였으니 말이다.
“앞으로 따로 만날 일, 없을 거예요.”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마치 당연한 것을 말하듯, 여자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니, 그것은 부탁도, 요구도 아닌 통보였다. 그것도 한 없이 일방적이고, 거절할 기회도 없는. 사실 통보가 아닌 부탁이나 요구였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쿠로코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자와 자신의 관계는 회사 내에 암암리에 퍼져있는 상태였고, 여자가 내민 청첩장에 나란히 적힌 사람의 이름은 여자의 결혼 상대가 그들이 다니는 회사의 전무이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문일까. 여자는 쿠로코에게 ‘헤어지자’는 말도, ‘우리 관계를 정리하자’라는 투의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정리할 관계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한없이 당당했고,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사실만을 읊는 아나운서처럼.
그런 여자에게 쿠로코는 굳이 우리가 헤어지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물어 화를 입을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답을 모르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는, 그가 해야 할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담담한 쿠로코의 대답에, 여자는 입술을 비틀며,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그리곤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으로 신경질적으로 제 앞에 놓인 유리잔을 두드렸다. 땡, 땡, 땡, 땡. 몇 번이고 유리잔을 손톱으로 두드리던 여자는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쿠로코를 흘끗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계산서를 낚아채듯 쥐어들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어요.”
계산은 내가 하도록 하죠.
짧게 덧붙인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쿠로코를 떠나갔다. 그런 여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쿠로코는 눈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유리문 너머로 여자가 사라지고, 그제야 시선을 덴 쿠로코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사실, 충격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신과 사귄다 생각했던 이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으며, 그 연인과 결혼을 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으니. 놀라우면서도,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째서 몰랐을까.
자신들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비밀 연애도, 몇 시간이고 연락이 되지 않았던 날도, 여자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는 수군거리던 시선도, 어쩐지 어정쩡했던 저희들의 관계도.
쿠로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앞에 놓인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꽃과 금박 무늬. 한 가운데에 프린팅 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의 웨딩 사진. 사진 속의 여자는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조금 전 쿠로코의 앞에서 지었던 표정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청첩장에 적힌 결혼식 날짜는 약 한 달 뒤였다. 그동안 자신을 만나면서도 결혼 준비를 착실히 해왔던 것일까. 덧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코는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세어 보았다. 이내 힘을 잃은 손가락이 다시 펼쳐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제 할 일을 잃은 손가락이 청첩장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가볍기 짝이 없을 종이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마치 철 덩어리를 들어 올린 것처럼.
결국 쿠로코는 청첩장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대신 이미 얼음이 다 녹아버린 물이 담긴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얼음이 녹으며 표면에 생긴 물방울이 차가웠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텁텁해진 입안을, 쿠로코는 단숨에 헹궈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냉수로 헹궈낸 입안은 어쩐지 씁쓸했고, 찬물로 젖은 손은 어쩐지 찝찝했으며,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쿠로코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쿠로코 테츠야는, 반 년 간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다.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오미네 다이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저분하지 않은 구릿빛 피부, 보통 사람들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큰 키, 짧은 남색 머리카락, 날렵한 턱선, 뚜렷한 이목구비. 쿠로코의 앞에 나타난 신입은 꽤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보다 20센티는 훌쩍 클 키를 하고 제 앞에 선 남자를, 쿠로코는 빠르게 한 번 훑어보았다. 용모는 문제가 없었지만 급히 달려왔는지 살짝 헝클어진 머리라던가, 접힌 셔츠 깃과 같은 부분들은 비즈니스 업계에서는 마이너스 점수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아오미네 군의 사수이자, 직속상관이 된 개발부 3팀 쿠로코 테츠야라고 합니다. 직책은 주임이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쿠로코…님?”
살짝 올라간 말투, 그리고 회사에서는 걸맞지 않은 ‘님’이라는 호칭에 앉아있던 쿠로코의 몸이 일순 삐끗 기울어졌다. 제 자신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게 뭐였지!?’라는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는 표정이 아오미네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갓 사회에 발을 내딛은 풋내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저보다 큰 덩치를 하고 있는 남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쿠로코는 작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오미네 군. 쿠로코 주임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너무 힘차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쿠로코 주임님.”
“그러면 아오미네 군, 일단 앉아주시겠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쿠로코의 지시에, 아오미네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근처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자 쿠로코는 제가 들고 있던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아오미네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갑작스럽게 급격히 좁혀진 거리에, 아오미네는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켰다. 들이킨 공기에서는, 깨끗한 세제 냄새가 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쿠로코는 손을 뻗어 아오미네의 구겨진 옷깃을 펴고, 빗을 들어 아오미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삐쭉 솟았던 머리의 산이 가라앉고, 약간 자국이 남긴 했지만 깃도 반듯이 펴졌다. 그 외에도 재킷의 라인을 잡아주거나 옷매무새를 하나하나 손봐준 후에야 쿠로코는 뒤쪽으로 크게 한 발짝 물러나 섰다.
“스즈하라 씨는, 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정하듯, 쿠로코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덧붙였다.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몇 번 보지도 않은 저한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쿠로코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관계―연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관계라며 쿠로코는 그렇게 지칭했다―는 스즈하라의 주도로 이루어졌노라고. ‘사귄다’라는 감각도 없이, 쿠로코는 스즈하라와 만남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서너 번 반복되었을 때, 이것이 사람들이 소위 부르는 ‘데이트’인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자각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스즈하라는 자신이 한가한 시간에 쿠로코를 불러냈고, 쿠로코는 약점 잡힌 사람마냥 스즈하라의 부름에 나가곤 했다. 그런 만남의 반복과 관계의 지속. 쿠로코 역시 그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다만 한 친구의 ‘사귀는 거 아냐?’라는 물음을 들었을 때 그런 걸까요. 하고 생각해 보았을 뿐.
그럼에도 배신감은 쿠로코에게 찾아왔다. 가슴을 억죄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아마도 이것은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고통은 아닐 것이라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쿠로코가 느낀 것은 사랑을 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배신감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로워했다.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그 사람을, 좋아했어요?”
“아뇨,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괴로워요?”
아오미네의 물음에,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 때마다, 턱까지 흘러내렸던 눈물이 후두둑,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테이블 너머에서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기에, 두 사람의 거리는 멀었다. 아오미네는 주저 없이 쿠로코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갑자기 다가온 아오미네의 행동에 놀란 듯, 쿠로코는 발개진 토끼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아직 사용하지 않은 여분의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한 번, 두 번. 물수건을 네모지게 접은 아오미네는 한쪽 손으로 목이 아프지 않게 쿠로코의 뒤통수를 받치고, 천천히 물수건을 눈에 대어주었다.
“누르지 말고 있어요. 눈 쓰리니까.”
“아오미네 군은, 정말 상냥하네요. 상냥한 사람이라서, 물어봐 주었던 겁니까?”
“무슨 소리에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는걸요. 뒤에서는 제가 스즈하라 씨와 사귀었다고, 끼어든 것은 저라고, 나쁜 것도 저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도 저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단 말입니다.”
억울하다는 듯이, 쿠로코는 말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지레짐작으로, 당연히 그랬거니 하며 쿠로코가 스즈하라를 꼬드겨냈다는 소문만이 회사 내를 떠돌아다녔다. 오랫동안 사귀었고 앞길이 창창한 연인을 두고 쿠로코와 사귈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소문의 근거라면 근거였다.
그런 소문의 사이에서, 쿠로코는 자신을 변호할 말 한 마디를 내뱉지도 못했다. 그것을 들어줄 사람도, 믿어줄 사람도 그의 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즈하라의 곁에는 그녀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많았지만, 그녀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열어도 쿠로코에게 좋을 말을 할 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쿠로코를 떠날 때 한 말처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상황을 방관했다. 때문에 소문에 휩싸인 것은 쿠로코 혼자만의 일이었다. 그 누구도 스즈하라에게 가십거리에 대해 묻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말할 수 없었어요.
저 혼자만의 괴로움이 억울해서, 왜 자신만 이렇게 소문에 휩싸여야 하는지 생각하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말해버릴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쿠로코는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이 야기할 소란이, 저보다는 스즈하라 쪽에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었어요.”
차마 말할 수 없었다는 말을 쿠로코는 되풀이했다. 두 계절이나마 함께한 사람. 설령 그 관계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관계로 끝났다 해도, 쿠로코는 매정히 그 사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입사 후 단조로운 일상만을 보내고 있던 자신에게, 잠시나마 친구―라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가 되어주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제가, 잘못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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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 스케치북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따라 쿠로코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 시선에 끝에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가 자리했다. 훌쩍 큰 키에 까만 피부, 짧은 남색 머리카락, 뚜렷한 이목구비.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님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쿠로코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오미네 다이키.
제가 입학하던 해에 무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학했던 학생이었다. 농구라는 스포츠에 한 획을 그은 남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농구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고, 엄청난 인센티브로 대학에서 모셔오다시피 했던 남자였다. 딱 한 번이었지만, 쿠로코는 그의 플레이를 눈앞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입학한지 며칠 되지 않은 대학 대항 친선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 파워, 컨트롤에 쿠로코는 자신이 경기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압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같은 팀의 팀원이자 쿠로코의 고등학교 동창인 카가미 타이가는 아오미네를 엄청난 인간이라고 칭했고, 사람들은 그를 ‘검은 맹수’라고 일컬었다. 아오미네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았을 때, 사람들의 비유가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쿠로코는 내심 생각했다. 그 후에도 아오미네가 때 아닌 부상으로 인해 농구를 그만뒀다는 이야기와 경찰학과로 전과해 높은 성적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데,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 걸까.
“쿠로콧치도 알죠? 아오미넷치는 유명하니까요. 아오미넷치, 이쪽은 아까 말했던 쿠로콧치.”
“안녕하세요. 쿠로코 테츠야라고 합니다.”
“아오미네 다이키다.”
키세의 소개 아닌 소개에 쿠로코는 직접 제 소개를 해야 했다. 아오미네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소개를 해오는 쿠로코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리고 아오미네는 판단했다. 쿠로코는 범인이 아니라고.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저기, 테츠.”
“네?”
쿠로코는 갑작스러운 아오미네의 부름에 살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오미네였기에 쿠로코는 그가 잠을 잔다고 생각했다. 재미로 그리던 것이기 때문인지, 평범한 수채화이기 때문인지 쿠로코의 그림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막 사인을 남기려는 듯, 쿠로코의 손에는 검은 물감이 묻은 얇은 붓이 들려 있었다.
“테츠는, 어쩌다가 미술을 하게 됐어?”
날짜를 쓰던 손이 삐끗했다. 일순간 쿠로코의 표정이 굳은 것을, 아오미네는 놓치지 않았다. 오늘의 날짜는 7월 31일. 하지만 쿠로코의 손이 엇나간 탓에 7이 조금 비뚤게 적혀 있었다. 쿠로코는 비뚤어진 부분을 대충 손으로 문지르고, 다시 오늘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예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에 재능이 있다고,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럼 원래 하려던 건?”
아오미네의 집요한 물음에 쿠로코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화를 낼까. 아오미네는 넌지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만뒀습니다. 재능이 없었으니까요.”
쿠로코는 화를 대신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대답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벽 쪽을 향해 누웠다. 쿠로코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꼭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쿠로코는 말없이 스케치북 마지막에 제 이름을 적고, 붓과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쿠로코가 나간 후에야, 똑바로 누운 아오미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한 번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건드리지 말아야했던 것이었을 테다. 아오미네는 한숨을 내쉬며 꽃병에 담긴 자양화를 바라보았다.
푸른색을 자랑하는 자양화가, 눈이 부셨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어느새 조용해진 화실에서 그림 한 장을 끝낸 쿠로코는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코를 골지 않고 아기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쿠로코는 한쪽 구석에 개켜져 있던 담요를 아오미네에게 덮어주었다. 담요 두 개를 아오미네의 몸에 골고루 덮어주던 쿠로코는 문득 아오미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만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짙은 눈썹과 길게 찢어진 눈매, 앙 다물린 입술. 그러고 보면 꽤 오래 함께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오미네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오미네의 미간에는 하도 인상을 많이 썼기 때문인지, 조금의 주름이 져있었다. 쿠로코는 작게 웃으며 아오미네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아오미네는 한층 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야 원. 쿠로코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아오미네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아오미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쿠로코는 이젤을 끌어다가 아오미네의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져와 천천히 아오미네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아오미네를 그리는 선은 하나하나가 날카로웠다.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꼼꼼히 살펴가며 조심스레 선을 이어나갔다. 한참 동안 손을 움직인 후에야,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오미네가 하품을 하며 눈을 뜨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아, 아오미네 군? 깨어 있었습니까?”
“조금 전에. 테츠, 나 그린거야?”
아오미네의 물음에 쿠로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서 일어나던 아오미네는 제 몸에 덮인 담요를 보고 피식 웃고는 이젤로 다가와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스케치북에 그려진 제 모습은 거울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쿠로코가 스케치한 제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낯익고 정감있는 인상을 주었다. 아오미네는 연필로 그려진 제 모습을 두어 번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림에서 쿠로코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오미네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쿠로코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사귀게 된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태연히 제 손을 잡으려는 이 남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안된다고 설명하면 좋을까.
“왜? 테츠?”
“아오미네 군,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게 뭐? 오히려 제게 되물어오는 아오미네를 보자 순간 쿠로코는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자기들은 이제 사귀는 사이라며 손을 잡고 걷자는 아오미네의 말을, 쿠로코는 단박에 거절했다. 분명히 아오미네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지만 때와 상황을 가려주면 안 되는 것일까. 그 말을 했더니 아오미네는 어차피 도시에 돌아가면 손도 못 잡게 할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되물어왔다.
그리고 그 말에 쿠로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아오미네의 말이 맞긴 했다. 도시, 그것도 대학 한 복판에서 손을 잡고 돌아다닌다면 소문이 어떻게 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것도 상대가 학교에서 무수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아오미네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아오미네와 사귄다는 것이 부끄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무수한 시선에,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쿠로코는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은 토요일 한 낮이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따라가겠다며 따라 나온 아오미네는 손을 잡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낮은 일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추수 철이 지났다 하여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없다고 하더라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시선 속에서 아오미네의 손을 잡고 다닐 용기는 없었다.
“아오미네 군.”
“어?”
도착하면 실컷 잡게 해드릴게요. 쿠로코는 중얼거리듯 말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쪽에서 아오미네가 어? 뭐라고? 라고 물어왔지만 쿠로코는 말없이 제 걸음을 재촉했다.
잡히면 끝장이었다.
# 월령연모가
환한 빛을 내던 조명 빛이 하나 둘 꺼졌다. 그리고 주위가 깜깜해졌을 때, 단 한 곳에 환한 조명 빛이 감싸 안는 그곳은, 무대였다. 청중들의 박수, 환호와 함께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기모노를 겹겹이 몸에 두른 여성은 쿠로코 테츠나(黑子 テツナ)라는 이름을 가진, 장안의 화제가 된 게이샤였다.
하얀 얼굴과 길게 늘어뜨린 하늘색 머리카락, 바닥에 화려하게 펼쳐진 치맛자락. 모든 게이샤가 두터운 분을 얼굴에 칠하는 것과 달리 새하얀 가면을 쓴 그녀에게서는 다른 게이샤들과는 다른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비단이 바닥에 스쳐 내는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가 무대 중앙에 섰을 때, 무대 구석에 있는 악공이 손을 들었다.
악공들의 손이 일제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고풍스러운 음악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현을 튕기는 소리로 시작된 음악에 게이샤가 손에 들린 부채를 펴고, 나긋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또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놀림에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느릿해진 곡조와 함께 움직임이 점점 느리게 변했다. 그리고 일순간 음악이 멎었고, 맑은 목소리가 다시 시작된 음색을 타고 울려 퍼졌다. 여자치고는 약간 낮은, 하지만 고운 미성(美聲)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약간은 나른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였다. 날 서지도 않고, 귀를 찢을 듯이 높지도 않은 목소리에 관객들이 혀를 내둘렀다.
“허, 거참 소문은 들었지만……. 보통 게이샤가 아닌 듯 합니다 그려.”
“그러게 말입니다. 장안에서 소문이 날 법하군요. 그런데 그 소문도 사실입니까?”
“가무(歌舞) 외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 말입니까? 듣자 하니, 아카시 가(家)의 아이라 하더이다.”
아카시 가(家). 일본에서는 모를 이가 없을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대대로 뛰어난 지략과 힘을 갖춘, 문무를 겸비한 집안이었다. 특히 현재 당주(堂主)인 아카시 세이쥬로(赤司 征十)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냉정하여 감히 그에게 대적하려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낱 게이샤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꽤나 재미가 좋은 모양이라며 농담이라도 던졌겠지만, 극장에는 듣는 귀가 많았고 상대가 아카시 가의 당주인 만큼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군중들 사이로, 말없이 무대를 응시하는 이가 있었다. 짙은 남빛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무대 위를 움직였다.
“아오미넷치, 아오미넷치?”
“……어?”
“괜찮습니까? 멍 한 것 같은데.”
“어……뭐.”
“멋지지 않습니까? 이 게이샤의 공연, 유명하다구요?”
키세의 물음에 아오미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성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뿐사뿐 움직이는 걸음걸이, 매끄럽게 펼쳐졌다 접히는 부채, 가는 듯 하면서도 짙은 중성적인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오미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지 않겠다며 투덜거리던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넋을 잃고 앞을 바라보는 아오미네를 보며 키세가 샐쭉이 웃었다. 하지만 그런 키세의 웃음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아오미네의 시선은 오롯이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무엇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테츠.”
“……네?”
“베일, 벗어보면 안 돼?”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오미네 군은 왜…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겁니까?”
“궁금해서.”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질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에 쿠로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이유는 아마도 단순한 흥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쿠로코를 찾아온 것은 얼굴이 궁금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 얼굴을 본 순간, 아오미네는 저를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몰랐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박이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눈길을 피하며 옷깃을 손에 꼭 쥐었다. 곱게 접혀 있던 옷자락이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쿠로코는 그 주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얀 손이 천천히 베일 아래쪽을 잡았다. 그 모습에 아오미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베일이 올라가고, 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롭지도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은 턱이었다. 조금 더 손이 올라가자 붉은 입술이 나타났다. 연한 붉은색을 띄고 있는 입술은 부드러워 보였다. 다시 손이 움직이고 오똑하니 작은 코와 하늘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늘을 담고 있는 듯 커다랗고 맑은 동그란 눈동자에, 아오미네는 숨을 죽였다. 이어서 하얀 이마가 드러나고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
쿠로코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오미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 하니 쿠로코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오미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고 길어지는 동안 쿠로코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오미네는 이제 저를 찾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예 이 자리를 박차고 나설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오미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쿠로코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예쁘네, 테츠.”
# 귀여운 스토커
EPISODE.1
Cute Stalker
누구나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러한 선호와 비선호는 사소한 습관 뿐만 아니라 사회나 가정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생활에 깊이 연관되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탕수육에 소스를 뿌려먹지만 타자는 찍어먹는 걸 좋아한다거나, 가정 환경의 영향으로 치킨의 특정 소스를 고집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색깔을 좋아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렇듯 선호와 비선호가 나타나는 것은 별반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쿠로코 역시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는 학생이었다. 타고난 체력이 미약한 탓에 직접 할 수 없는 스포츠 관람을 좋아했고, 독서를 즐겼다. 또한 탄산음료를 싫어했고 달달한 바닐라 셰이크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자연 풍경과 같은 사진을 찍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그러한 사소한 취미가, 쿠로코로 하여금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쿠로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메라 렌즈에 눈을 가져다댔다. 카메라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평소에 그가 초점을 맞추던 자연 환경이 아닌 한 명의 사람이었다. 자동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 시스템이 선명하게 이미지를 담자마자, 쿠로코는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쿠로코는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카메라에서 촬영음도 나지 않았지만, 몰래 찍는 탓에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쿠로코는 슬며시 나뭇가지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쿠로코가 몰래 찍고 있는 사람은 쿠로코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아랑곳 않고 농구공을 바닥에 튀기고 있었다. 그것도 환한 미소를 얼굴에 담아가면서. 그 모습에,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카메라를 든 손이 남자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숨을 죽이고, 초점을 맞추고, 침을 꼴깍 삼키며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이나 셔터를 눌러댔을까. 이제는 세는 것 마저 포기한 쿠로코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숨어 사진을 찍었다. 그러한 행동은 남자가 체육관 안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계속되었고, 남자가 자리를 떠난 후에야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며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쿠로코는 카메라를 가방 속에 밀어 넣으며, 최근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쿠로코가 한 것은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하여 찍은 사진 파일을 화면 가득 펼치는 것이었다. 카메라 칩 속의 파일을 복사하여 오늘 날짜로 새로 만든 폴더에 옮긴 쿠로코는 마우스로 사진 파일을 클릭했다. 그러자 한 사람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까만 피부. 조금은 위로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 짙은 푸른색 눈동자와 날선 눈매, 그리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얼굴라인. 자칫 매서워 보일 것 같은 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담긴 미소는 결점마저도 지워줄 정도였다.
쿠로코는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사진을 넘겼다. 차례차례 사진들이 줄지어 넘어갔다. 환한 얼굴, 조금은 찌푸린 얼굴, 그리고 다시 웃는 얼굴. 한참 동안 넘기는 사진은 삼십 장을 넘겨가고 있었다. 그것도 오늘 하루 찍은 사진뿐이었다. 쿠로코가 찍은 남자의 사진은 날짜 별로 분류한 폴더로만 어느덧 50개를 넘어갔고 사진 수는 1000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쿠로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참으며, 키보드 위에 털썩 엎어져버렸다.
아오미네 다이키. 15세.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소속. 포지션 파워포워드.
이것이 쿠로코가 남자—아오미네에 대해 아는 것 전부였다. 같은 학년의 아오미네는 학교 내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소문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쿠로코의 성격 상 쉽게 다가가기 힘든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물론, 어떻게 그에게 말을 걸 수 있겠냐마는 말이다.
이건 스토커인가요.
쿠로코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생각했을 때 자신의 행동은 스토커, 좋게 말해봤자 팬의 행동이었다. 그것도 악질이라는 사생팬. 어째서 여학생들이 아이돌 팬질에 그렇게 돈을 쓰며 소위 오타쿠라고 불리는 마니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시간과 돈을 쏟는지에 대한 이유를 새삼 확인하고 있었다.
쿠로코는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보다가, 사진을 그대로 띄워놓은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참 동안 하얀 천장을 응시하자 곧 사진에서 웃고 있던 아오미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쿠로코는 눈을 질끈 감으며 벽을 향해 홱 돌아누웠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꼭 상사병을 앓는 사람의 모양새였다. 아오미네를 볼 때면 가슴이 뛰었고, 그가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저도 기분이 좋아졌다. 때때로—보다는 자주— 그가 생각나는가 하면 가끔은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기도 했다. 물론, 한 번도 실천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떻게 말을 걸 수가 있겠는가. 반이 다른 탓도 있겠지만 활동적인 아오미네와 오히려 조용한 편에 속하는 자신, 책을 싫어하는 아오미네와 독서가 취미인 자신. 아오미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이다지도 접점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같은 남학생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좋아할 이는 없을 것이었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청춘 소설은 청춘 소설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당신의 팬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러한 생각이 벌써 수십 번. 차마 말을 걸 용기가 없어 셔터를 누르는 제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쿠로코는 내일을 위해 카메라를 충전기에 꽂고 있는 것이었다.
*
망했습니다.
쿠로코는 차마 말을 입 밖에 내뱉지 못한 채로,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불쑥 들이 밀어진 얼굴을 응시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까맣게 보이는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지만 조금 두근거리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느 때와 같이 한쪽 구석에 숨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가선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피할 새도 없이 쿠로코의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를 낚아채갔다. 현장에서 들킨 판에 도망쳐도 잡힐 것이 뻔했으며, 아오미네의 손에 인질이 잡혔으니, 도망갈 수도 없어 결국 쿠로코는 눈을 깜빡이며 아오미네를 바라보고 있는 꼴이었다.
잘생기긴 잘생겼네요.
본심은 숨길 수 없었던 탓에, 쿠로코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가까이서 보아도 꽤나 멋지게 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쿠로코가 그의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소위 얼빠는 아니었다.
예전에, 그가 경기에 참가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누구보다 빠른 스피드와 뛰어난 감각과 재능.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에이스라는 말이 초라할 정도로 경기에 임하는 그의 모습이 강하게 뇌리에 남았었으니 말이다. 그가 프레임에 담겨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계기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그러한 계기가 없었더라도 자신은 아오미네를 좋아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집 책꽂이 한 켠에 반듯이 꽂힌 교내 신문과 고교 농구 잡지가 증명해줄 일이었다.
“많이도 찍었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겨있던 쿠로코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로코는 잠에서 깬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아오미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잘 찍긴 했네. 사진부야?”
“아뇨, 도서부입니다.”
“흐응.”
아오미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메라 버튼을 이리저리 눌어 사진을 훑어보았다. 한참동안 사진을 돌려보던 아오미네는 끝까지 넘겨본 후에야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쿠로코에게 시선을 옮겼다. 꼴깍.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요즘 계속 사진 찍던 거, 너 맞지. 이름이, 쿠로코 테츠야?”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쿠로코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워낙 존재감이 약한 탓에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둘째치고라도 저의 이름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쿠로코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움을 읽은 것인지, 아오미네는 뒷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사진 찍는 거 알아차린 건 농구부에서도 나뿐이고, 이름은 사츠키가 알려줬고.”
아아. 그제야 납득이 갔다. 아오미네의 소꿉친구라는 모모이 사츠키의 존재는 뛰어난 정보원으로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런 그녀라면 숨겨지지도 않은 쿠로코의 이름 정도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였으리라. 한데, 아오미네가 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 말에 신경이 쓰였다. 알고 있었다면, 왜 이제야 저를 붙잡았으며 화부터 내지 않는지 말이다.
“죄송합니다.”
“뭐가? 아, 몰래 사진 찍은 거?”
아오미네는 대수 롭지 않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쿠로코에게 되물어왔다. 그런 아오미네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진을 찍는 것 정도는 괜찮단 말인가? 자신은 팬으로서 인식된 것일까. 쿠로코의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둘 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 의문을 불러일으킨 아오미네는 아랑곳 않는 표정이었다.
“저기, 화내려고 오신 것 아닙니까? 몰래 사진 찍지 말라던가…….”
“뭐, 비슷하긴 한데.”
아오미네는 말하면서도 계속 만지작거리던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허리를 굽혀 쿠로코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시 한 번 아오미네의 눈동자에 쿠로코의 모습이 오롯이 담기고, 쿠로코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팬이야? 아니면 스토커? 뭐, 키세 말 들어보면 그게 그거긴 하던데.”
콰쾅.
쿠로코는 머리를 망치로 두들긴 것처럼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팬이라고? 그래봤자 좋은 인상을 남기긴 어려우리라. 아니, 지금 상황에서 무슨 대답을 해도 좋은 인상을 남기긴 힘들테지만 어떻게든 그가 자신을 혐오한다거나 싫어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아니면 나를 좋아한다거나?”
점점 숙여가던 고개가 일순간 번쩍 들렸다. 당혹스러움에 든 얼굴이었으나, 아오미네의 얼굴에 서린 장난기 섞인 웃음에 쿠로코는 더욱 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다.
“정답.”
“아니, 저기 아오미네 군—”
“취소는 거절한다. 테츠도 이런 사진 보다는 실제 내가 더 좋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아오미네는 손가락을 움직여 카메라에 있는 모든 사진을 삭제해버렸다.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기분이었지만 그 와중에 저의 이름을 애칭처럼 줄여 부른 것이 신경쓰였고, 씩 웃는 아오미네의 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그의 사진을 찍은지 어언 한 달이 넘은 쿠로코의 경력에 의해 판단해보자면 이것은 결단코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도리어—
“나는 테츠가 꽤 마음에 드는데.”
그렇게 말하며 아오미네는 제 가방 옆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곤 말릴 새도 없이 버튼을 누르는가 싶더니 쿠로코에게 다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하얀 액정 화면에는, [아오미네 다이키]라는 새로운 메일 주소가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작은 창이 띄워져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쿠로코의 모습에 아오미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쿠로코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곤 제 손에 들린 카메라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 훈련 시간이라서 가야 하거든? 그러니까 그 메일주소로 연락해라. 이왕이면 나 훈련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면 좋고. 알았지, 테츠?”
저를 부르는 다정스러운 호칭에 쿠로코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오미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는 다시 만날 때 돌려주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떠나기 전, 쿠로코의 하얀 뺨에 작은 키스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고 말이다.
손을 흔들며 아오미네가 멀어져가는 것을 볼 때에야 쿠로코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화끈거리는 제 뺨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지금, 무슨?
꿈인가 싶어 볼을 세게 꼬집어보기도 하고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쿠로코는 눈을 연신 깜빡이다가 이내 제 휴대폰의 액정 화면이 메시지 작성 화면으로 바뀐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를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찌됐건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일어난 일, 더 부딪힌다고 크게 바뀌는 것은 없으리라.
조금의 두근거림과, 일말의 불안을 담아 쿠로코는 천천히, 휴대폰 버튼 위로 손가락을 옮겼다.
#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옷깃 틈새를 파고들며 불어오는 찬바람에, 쿠로코 테츠야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다시 세게 여몄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이르게 찾아왔고,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매서운 날씨에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이던 쿠로코는 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한 번 들어섰다가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늘어선 난방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풍이 쿠로코를 향해 밀려들었다. 턱 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 까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쿠로코는 학생증을 카드 리더기에 가져다 대었다.
삑, 하는 둔탁한 전자음과 함께 통로가 개방되었다. 조용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 쿠로코는 사람이 드문 한쪽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전공 서적이 들어있는 탓에 무거웠던 가방을 내려놓자 날개라도 돋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마냥 어깨가 가벼웠다. 묘한 해방감에 쿠로코는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책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쿠로코가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에는 다른 대학들에 비해 대중 서적이 꽤나 많이 비치되어 있는 편이었다. 최근 과제가 연이어 주어진 탓에 전공 서적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던 나날이 이어졌었다. 그랬기에 지겨운, 그것도 두터운 전공 서적을 버려두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대중 서적이 꽂힌 책장 쪽으로 다가서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비치된 곳부터, 조금은 철 지난 인기도서가 비치된 곳까지 차례대로 훑어가는 쿠로코의 손에는 책이 하나 둘 씩 늘어갔다. 끊임없이 책을 눈으로 훑어가며 발걸음을 옮기던 쿠로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쿠로코의 시선이 멈춘 것은 다름 아닌 해외 신문 위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탔는지, 어제 날짜의 신문 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꽤나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일주일 전의 신문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에게는 어제 신문에 난 기사가 꽤나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그리고 쿠로코 역시 그 사람들처럼 그 신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맨 첫 페이지에, 그에게 너무나도 낯익은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오미네 다이키.
쿠로코는 그의 이름을 되뇌며 찬찬히 사진을 눈으로 훑었다.
일본인이 아니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까만 피부와 길게 찢어진 눈,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코가 그리는 얼굴은 쿠로코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앳된 티를 벗어 조금 더 성숙해져 있었으며, 약간 야위어 있었다. 쿠로코는 새삼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으며 조심스레 신문에 인쇄된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테츠.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듣고 싶지 않았던 익숙한 목소리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며, 쿠로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 이유는 없었고, 그를 떠올릴 이유도 없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쿠로코는 스멀스멀 나타나는 기억을 떨쳐버렸다.
어느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는 짧아져 있었다. 쿠로코는 다시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은 당연하겠지만, 성인이 된 이후였다. 자주 담배를 피울 정도로 골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년에 한 번 정도, 그는 때때로 담배를 찾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렸을 때였다.
자신이 기억에서 도망치는 것이 비겁하다는 것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비참할 것이라는 것도 쿠로코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런 그 자신을 쿠로코는 묻어두려 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쿠로코의 본심이었다.
행복했던 과거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괴로웠던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쿠로코는 다시금 입에 물고 있던 꽁초의 끝부분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한 쿠로코의 행동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기억을 억누르려는, 작은 몸짓이었다. 그런 쿠로코의 상념을 깬 것은 선명하지 못한 전자음이었다. 방안이 조용하지 않았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꺼져갈 듯이 미약한 소리였다. 쿠로코는 몇 초간 울리다 끊긴 벨소리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계를 확인하자 꽤나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시곗바늘은 어느덧 열시를 넘겨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가 저를 찾아온 것일까. 쿠로코는 그런 의문을 가지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저를 찾아온 이를 확인한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랜만이야, 테츠.”
제게 인사를 건네는 이의 등 뒤로, 흩날리는 하얀 눈발과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의 미약한 리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모두가 즐거워할 것이 분명한 축복받은 날. 하지만 그런 축복의 날에, 쿠로코는 발밑이 꺼지는 듯 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성큼 큰 키와 까만 피부, 짧은 남색 머리카락. 멋쩍게 웃으며 익숙한 호칭으로 저를 부르며 인사를 건네 오는 이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리워했으면서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아오미네 다이키였다.
# TRICKSTERS
불 볶듯 뜨거운 열기였다. 아침부터 쏟아진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시멘트 바닥에서까지 열기가 올라왔다. 휘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점심시간을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오미네는 두 개의 도시락과 물병을 챙긴 후, 슬라이딩 하듯 먼저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고 앉은 쿠로코에게 달려갔다.
“으아, 더워! 뜨겁다고!”
“더운 건 이해합니다만 좀 떨어져주겠습니까, 아오미네 군? 더 덥잖습니까.”
“이열치열이라잖아. 그리고 테츠는 나보다 체온이 낮아서 시원하거든.”
“그렇지만 아오미네 군 얼굴만 봐도 저는 덥습니다. 그러니 좀 떨어주시죠.”
냉정한 쿠로코의 대답에 아오미네는 투덜거리며 쿠로코에게 떨어져 앉았다. 그리곤 쿠로코에게서 도시락 하나와 물병 하나를 건네받았다.
“나는 줄 서면서도 더웠거든.”
“덕분에 좋은 자리를 잡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는지 도시락을 뜯어 주먹밥 하나를 입에 밀어 넣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이 더위에도 아오미네의 식성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쉴 새 없이 아오미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을 보며 쿠로코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아오미네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주었다.
아오미네는 예의상 정말 괜찮겠냐는 물음을 두어 번 던지곤, 쿠로코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식사에 몰두했다. 그런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작게 웃으며 생수를 목으로 넘겼다. 아이스박스에 들어있어 시원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더운 열기를 이겨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빨리 도쿄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버렸다.
“테츠, 많이 피곤해?”
“네.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그래. 누가 합숙 장소를 이런 데로 정한거야.”
아오미네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는 도쿄 시내에 소재한 테이코 중학교였다. 당연히 그들의 집도 도쿄 내에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있을 수 있는 자신들의 방이나, 적어도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체육관이 아닌, 도쿄와는 거리가 먼 숲속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테이코 중학교 합숙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참가를 안 하는 건데.”
“별 수 있습니까. 강제 참가였잖아요. 3학년 전체가.”
“핑계는 많잖아. 병가라던가.”
“그것도 방법이긴 하겠네요.”
아오미네의 말에 가볍게 응수한 쿠로코는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합숙은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오늘이 이틀째였으니, 오늘밤만 지나면 돌아갈 것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체력이 좋은 아오미네는 멀쩡한 모양이었지만 쿠로코의 체력으로는 사실 오늘 아침부터만 해도 일어나기 힘들었다. 과연 내일 아침에는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쿠로코의 체력을 잘 아는 아오미네는 땀으로 이마에 찰싹 붙은 쿠로코의 앞머리를 떼어 넘기고,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두었던 부채를 꺼내들었다. 살랑살랑, 천천히 부채를 흔들자 작은 바람이 일어나 쿠로코의 이마에 흐른 땀을 식히기 시작했다. 작은 바람이었기에, 그 더위를 몰아내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쿠로코의 입가에 작은 미소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한 바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오미네 군.”
“이런 걸로 뭘. 정 고마우면 뽀뽀 한 번 해주면…”
“집합!!!”
아오미네의 말을 자르고,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쿠로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오미네는 아쉽다는 듯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웃으며 빈 도시락 통과, 이제는 미지근하게 데워져버린 물병을 집어 들었다.
“갈까요, 아오미네 군.”
“알았어, 가.”
아오미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쿠로코의 뒤를 따랐다. 언뜻 본 하늘은, 언제나와 같이 푸르렀다. 파랗게 맑은 하늘을 보며, 아오미네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조금이나마 달아났던 더위가, 다시 그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이어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아아, 안녕하세요. 테이코 중학교 학생 여러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도 걸맞지 않는, 경쾌한 목소리였다.
-지금 이 상황에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서프라이즈~! 여러분은 ‘실험’에 참가하게 되셨습니다.
실험?
쿠로코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런 쿠로코의 생각은 관심 없다는 듯, 방송을 잡은 사람은 말을 이어갔다.
-먼저, 각자 자신의 배낭을 지급 받으셨을 텐데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주세요. 초기 비밀번호는 자신의 생일입니다! 잘못된 비밀번호를 누르면 폭발하니 진지하게 눌러주세요! 농담 아니고 진짜에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엄청난 소리가 났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들어보았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크고, 광폭한 소리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살피자, 숲속 안쪽에서 회색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쿠로코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이런, 누가 입력을 잘못했나 보네. 농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은 조심하도록 해요~
천연덕스럽고, 태연한 목소리였다. 저 연기는 일부러 해놓은 연출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실일까. 혹시라도, 진짜라면?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는 쿠로코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과연, 열어도 괜찮은 것일까.
아오미네 역시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생일을 눌렀다. 0831. 그러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오미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쿠로코를 보고 그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았다. 그리곤 천천히, 쿠로코의 생일을 눌렀다. 0131. 번호를 누르자, 아오미네의 것과 같은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상자가 열리고, 열을 센 후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쿠로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폭발하는 소리가 난 이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 역시 긴장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쿠로코는 천천히, 열린 상자 안을 살폈다. 아오미네 역시 자신의 상자를 열어보고 있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튼튼해 보이는 검은색 권총, 그리고 총탄이 들어있는 상자, 그리고 작은 시계였다.
“총…?”
쿠로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상자 속에 들어있던 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난감 권총치고는 꽤나 세세하게 잘 만든 태가 났다. 쿠로코는 상자 속에 손을 넣어 총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묵직한 무게. 그 감각이 손에 닿았을 때 쿠로코는 깨달았다. 이 총은, 가짜가 아니다.
-지금쯤이면 상자를 다 열었을 것 같군요! 그럼 상자 안에 있는 손목시계를 차주세요. 3분 이내로 차지 않으면, 폭발합니다!
경쾌한 목소리가 읊는 내용은 잔인했다. 망설일 새도 없이, 아오미네가 손목에 시계를 찼다. 그와 동시에, 손목시계에 반짝이던 붉은 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아오미네가 시계를 찬 것을 본 쿠로코 역시 주저하지 않고 시계를 왼쪽 손목에 찼다. 그러자, 위험을 알리듯 깜빡이던 붉은빛이 사라졌다.
시계를 손목에 찬 쿠로코는 유심히 시계를 살펴보았다. 시각을 알려주는 시곗바늘 뒤로, 날짜인 듯 한 숫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있었다. 59. 대체 이게 무슨 뜻이지?
-아아, 모든 학생들이 시계를 찼으니 ‘실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실험’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살아남으세요.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으세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말만이, 쿠로코의 귓가에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살아남으라는 말에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가지 있었다. 생존. 서바이벌. 그러나 그런 것은 생소했고 일상적이지 못한 단어들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살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들려오는 방송은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소리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자세한 사항은 함께 들어있는 룰 북을 참조할 것. 적혀 있는 룰을 어길 시 시계는 자동적으로 폭파되니 참고하세요. 우리의 목표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을 ‘관찰’하는 것이니까요. 이 ‘실험’은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을 경우, 종료됩니다. ‘실험’에 참가하려는 의사가 없다고 해도,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이 시계를 찬 순간, ‘실험’은 시작되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방송하던 사람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경쾌한 목소리와도, 울려 퍼지는 방송과도 걸맞지 않지만, 그가 설명한 ‘실험’과는 딱 맞아 떨어지는, 기괴한 웃음소리였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피부는 물론이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에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등목 뒤가 서늘해졌다.
-그럼, 건투를 빌어요. 제군.
경쾌한 목소리가, 마이크 선을 끊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불쾌한 전자음과 동시에, 다시 한 번 긴 사이렌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약 1분 동안 울려퍼진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쿠로코는 깨달았다.
‘실험’이, 정말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 MASQUERADE
쿠로코 테츠야가 11계로 배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겨우내 굳어있었던 하얀 눈이 녹아 따뜻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완연한 봄의 일이었다. 무거운 목제 책상을 사이에 둔 채 얼굴을 마주한 쿠로코와 상관의 표정은 엄숙함을 넘어 무겁기 짝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쿠로코는 입안에서 맴도는 문장 몇 개를 갈무리 하여, 힘겹게 물음을 꺼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말한 그대로일세. 11계로 옮겨가도록 하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입니까?"
“유감이지만 이건 명령이야. 이미 상부에서 결정한 일이니 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상관의 말에 쿠로코는 제 귀를 재차 의심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상관은 그런 쿠로코의 표정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미 짐은 11계로 옮겨놨다는 말을 읊어주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던 서류를 간추려 들며 쿠로코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그런 상관의 행동에, 쿠로코는 자신이 더 무엇을 말한다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평소와 달리 조금 거칠게 문을 닫은 쿠로코는 텅 빈 복도에서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째서.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주어진 1주일의 휴가. 그것부터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다. 소위 형사라고 불리는 본청 수사과의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휴가가 주어지지 않았다. 사건이 없을 때는 자유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사건이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면 눈코 뜰 새 없이 사건을 해결하기위해 뛰어다녀야했다. 그런 일상이 근 2년간 반복되었기에 휴가가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던 쿠로코였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그것도 제게만 주어진 1주일의 휴가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자신에게 주어졌던 휴가를 받아들인 것은 그동안 제대로 쉰 적도 없지 않았느냐며 좀 쉬고 오라는 상관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경찰직에 몸을 담은 지 겨우 2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렇다 할 사고를 친 적도 없었고, 상부의 말을 거역한 일도 없이 조용히 자신의 업무에 집중해왔었건만, 갑작스레 11계로 이동하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말이 좋아 이동이었지 5계에서 11계로 가라는 것은 거의 강등이나 다름없었다.
1계부터 10계까지의 순서는 기본적으로 실적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런 가운데 5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던 쿠로코에게 11계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절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일인 것이다. 그나마 10계가 아닌 11계라는 것을 다행히 여겨야 할까. 쿠로코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유별나게도, 11계는 여타의 하위권 계보다는 실적이 월등이 높았다. 때때로는 쿠로코가 속한 5계를 능가할 정도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1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쉽사리 납득할 수는 없는 형국이었다.
쿠로코는 천천히 11계가 있는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체념한 채 옮기는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상부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몇 번이나 제 자신에게 되뇜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의문은 쉽사리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 잘못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더라면 납득이라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11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충분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에 몸을 담은 지 2년 째, 경찰이라는 조직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과 함께 천천히 옮겼던 발걸음은 어느새 쿠로코를 11계의 문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쿠로코는 회색 철문에 붙어 있는 하얀색의 조그만 명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는 검은색 글씨로 ‘수사과 11계’ 라고 적힌 명패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쿠로코는 천천히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11계의 내부 모습은 쿠로코가 몸담고 있었던 5계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경찰서 건물 자체가 투박한 시멘트로 지어진 것이었으니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크게 바뀔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말이었다. 5계의 뿌연 창문과는 달리 깨끗하게 닦인 창문 틈새로 환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그리고 그 햇볕을 맞으며 앉아있는 세 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으며, 쿠로코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11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쿠로코 테츠야라고 합니다.”
자기소개 아닌 자기소개를 하고 고개를 들자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저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을 유연히 소화해내며, 말끔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얼굴. 가늘게 접힌 붉은 눈동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칼날과 같이 빛나고 있었으니.
아카시 세이쥬로. 엄청난 두뇌의 소유자로 더 높은 직급에 오를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11계를 이끌고 있는 남자. 그의 이야기는 경찰서 내의 가십에는 관심이 없는 쿠로코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11계가 높은 실적을 올리는 것의 절반은 그의 힘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말이었다. 그런 아카시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쿠로코로서도 처음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공기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잘 왔어, 테츠야. 나는 아카시 세이쥬로. 11계를 전담하고 있어.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익숙해지도록 해. 나는 바꿀 생각이 없으니 말이지. 그럼 우리 쪽도 소개를 해볼까.”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카시는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눈을 끔벅거리고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거구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입에 잔뜩 넣어 볼록한 볼을 우물거리며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작은 과자 가루가 잔뜩 묻어있었다.
“내 이름은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잘 부탁해, 쿠로칭~.”
무라사키바라의 말에 쿠로코는 다시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이 남자에 대한 소문 역시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200cm가 넘는 장신일 뿐만 아니라 순경 직으로 본청에 들어오자마자 근처의 편의점을 싹 쓸었다는 소문으로 유명했던 것이었다. 새삼 직접 보니 이 덩치로 편의점의 과자를 싹 쓸어가는 모습은 꽤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법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사키바라가 뒤쪽으로 조금 물러서자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사람 한 명이 쿠로코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라사키바라보다는 작지만 충분히 장신이라고 불릴 정도의 남자였다. 까만 피부와 삐죽하게 뻗은 짧은 남색머리카락. 제 안방인 양 의자에 기대어 책상에 발까지 올려놓고 눕듯 앉아있는 남자는 쿠로코의 시선이 저를 향함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갖출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오미네 다이키.”
남자는 삐딱한 시선으로 쿠로코를 바라보며, 짤막하게 제 이름을 뱉어내었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쿠로코는 그에 대한 소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아오미네 다이키. 그 역시 평범한 이는 아니었다. 이름 없는 단기 대학 졸업 후 공개 채용시험을 보고 경찰이 되었다는 아오미네를 둘러싼 소문은 무수히 많았다. 지구대에 들어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천적인 감과 천부적인 체력과 발군의 운동실력으로 높은 검거율을 자랑하며 흔치 않게도 본청으로 들어오는 빠른 승진의 주인공이 되었던 남자였다. 11계의 행동대장으로도 불리는 아오미네는 남녀 가릴 것 없이 본청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으로도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카시와 아오미네, 무라사키바라로 이루어진 11계. 기본적으로 최소 4명으로 이루어진 반을 두 개 이상 보유한 다른 계와 달리, 한 반을 채우지도 못할 세 명이라는 소수(少數)로 이루어진 11계는 종종 기인(奇人) 집단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이런 곳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제가 배속된 이유를, 쿠로코는 다시 한 번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에 대한 대답 대신, 아카시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상자가 쌓인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테츠야는 저 자리를 사용하면 돼. 일단 짐 정리부터 하도록.”
“알겠습니다.”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 책상이라고 안내받은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옮겼는지, 그의 짐은 잡다하게 상자 안에 섞여 있었다.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며,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아오미네 군?”
“가자, 테츠. 데려다 줄게.”
“괜찮습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무엇이 그리도 괜찮은지,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등을 떠밀며 11계의 문을 닫았다. 그런 아오미네의 행동이 조금 불편하다고 느끼며 쿠로코가 제 등에 닿은 아오미네의 팔을 떼어 놓았을 때였다. 쿠로코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잠시만요, 아오미네 군. 저 전화가…”
“또 키세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쿠로코가 휴대폰을 확인할 새도 없이, 빠르게 쿠로코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쿠로코의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키세가 맞았다. 망설임 없이 휴대폰의 종료 버튼을, 아오미네는 힘껏 눌렀다. 그런 아오미네의 행동이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불렀다.
“…아오미네 군?”
“테츠는, 날 어떻게 생각해?”
“…네?”
아오미네의 물음에, 쿠로코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러나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쿠로코는 그 대답을 입에서 꺼내놓는 대신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대답을 택했다.
“좋은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그 뿐이야?”
아오미네의 푸른 눈동자가, 그의 진득한 시선이 쿠로코에게 닿았다. 그런 아오미네의 눈길을, 쿠로코는 반사적으로 피했다. 그런 쿠로코를 바라보는 아오미네의 손에서, 다시 한 번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도 발신자는 같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과 보채듯 울리는 휴대폰. 초조함과 불안감이 겹쳐져, 아오미네는 힘주어 휴대폰의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겹게 입을 떼었다.
“말해줘, 테츠. 나는…테츠를 좋아해.”
순간, 바람이 불었다. 차라리 저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쿠로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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